2014년 9월 28일 일요일

덴마크 여정기












코펜하겐 공항에서 내린 후 처음 맞이하는 덴마크의 모습. 바닥이 빛나는 대리석이 아니라 마루바닥이었다. 그 느낌이 친근하고 편했다. 덴마크인 덩치의 2/3도 안되는 내 아내는 잠에서 덜 깬 딸을 안고 장도를 걷고 있다. 그 옆에 아들은 한국에서도 이 곳에서도 항상 벌새처럼 마냥 들떠있다.










28인치 가방 1개, 24인치 가방 2개, 20인치 가방 1개, 그리고 새롭게 만들어진 두개의 짐 가방, 그리고 각자 배낭 1개씩. 이사짐을 부친 후 한달간의 기간 동안 새롭게 생긴 짐들이다. 가방 속의 내용물은 기회가 되면 다음에 알려 드리겠다. 규정상 1인당 수화물 1개, 기내 수화물 1개였다. 수화물 무게는 23키로를 넘지 않아야 하고 기내 수화물은 10키로 이하다. 항공사 마다 다르지만 내가 선택한 항공사는 무게 규정이 엄격하지 않았으며 해외 장기 거주 예정자임을 확인해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몇 키로 넘은 것은 그냥 봐주는 것 같다. 하지만 기내 수화물은 너무 심하면 안되나 보다. 20인치 가방에 하드디스크와 만화 식객 세트(27권, 약 10키로)를 넣었더니 15키로가 되었는데 결국 기내로 가져가지 못하고 수화물로 부쳤다. 만화 식객 세트는 기내에서 읽을 거리가 필요했고 마지막 식사때 형님댁에서 봤는데 좋아보였었고, 이사짐이 올때까지 아들과 함께 읽으면 좋겠다 싶었다. 물론 아내의 적극적 추천도 한 몫 거들었다.




덴마크에 오게 된 계기.



불면의 밤을 보내고 있다.



미노스의 미궁에서 빠져 나올려면 명주실을 풀면서 들어가야 한다. 미궁에 던져진 나에게 덴마크는 명주실 같은 것이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내 미래는 진한 안개에 쌓여 보이지 않았다. 안개 속을 걷다보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듯 난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무수히 치어 넘어지고 있었다. 그러한 반복적인 답답함과 불안함이 익숙해져서 무덤덤한 일상이 될 즈음에 불현듯 새로운 발상의 전환이 머리 속 깊은 곳에서 툭 튀어 나왔다.
그건 언제까지 남이 만든 게임에 들어가서 억지로 나를 끼워 맞춰야 하나? 하는 생각이었다.
“그래, 내가 게임의 룰을 만들자!” 하면서 막연하게 생각한건 유학을 가자 였고 의식의 흐름은 외국에서 살아보자는 쪽으로 방향이 잡아졌다. 그렇게 되기 까지 약 6년에서 7년이 걸린 것 같다.
그러나 꼬리를 물고 오는 그 다음 생각은 지금까지 쌓아온 변변찮은 지위와 명예를 놓을 수 있는가? 였다. 나를 자식 이상으로 아끼시는 부모님, 형님네와 누님들 가족, 몇 안되는 나의 소중한 친구들과 직장 동료들, 대출을 끼고 산 포근한 나의 아파트, 일마치고 마시는 시원한 맥주 한 잔과 오징어 안주. 그 다음날 먹는 속풀리는 얼큰한 해장국. 나와 이것들은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엮어져서 옭아매고 있었다.
이민, 세상살이가 힘든만큼 요즘 사람들이 쉽게 입에 달고 다니는 말이다. 뱉기는 쉽다. 하지만 실행하기에는 단어의 무게감이 태산만큼 진중하다.
그러나,
사는게 지쳐서 비닐을 스스로 얼굴에 뒤집어 쓴 채 숨이 막혀 헉헉대고 있는 자신을 자각하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래, 맞아’ 그런 것 같다. 비닐을 자신의 얼굴에 씌운 사람이 바로 나라는 사실, 그리고 뒤집어 쓴 비닐을 붙잡고 공기가 통하지 않도록 내 손으로 목을 죄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가 쉽지 않다. 남의 탓하기도 버거운게 현실이다. 비난의 화살을 돌린 그 남들도 자신과 별반 다를게 없는 오십보 백보 인간들이란 것을. 비닐을 붙잡은 손으로 손수 얼굴에서 벗겨내면 된다.
덴마크에 온지 며칠이 지났지만 아직도 시계가 새벽 1시를 가리키는 한국시간으로 아침 8시가 되면 어김없이 잠에서 깨어 불면의 시간을 보낸다. 이렇듯 내 몸은 아직도 한국의 생체 리듬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왕년에 피아니스트였던 울라 할머니네 집 반지하에서 끄적이고 있는 지금 이 시간, 9살 된 아들, 4살배기 딸은 나와 함께 덴마크의 어둠을 밀어내고 있다. 우리는 여명이 서서히 밝아올 즈음, 낮잠을 자듯이 울라 할머니가 마련해 준 푹신한 침대 속으로 숨어들어 갈 것이다.
삼겹살 맛도 다르다. 밥 맛도 다르다. 라면 맛도 다르다. 우유 맛도 다르다. 물 맛도 다르다. 심지어 공기 맛도 다르다. 수십년 넘게 내 몸이 기억하는 한국 맛과 며칠 밖에 되지 않은 덴마크 맛은 확실하게 달랐다. 그 뿐이랴! 사람 맛은 같으면서도 더욱 다르다. 대체적으로 무뚝뚝하고 무표정한 얼굴은 한국과 다를 바 없다. 무뚝뚝한 그들에게 길을 물어볼랴 치면 모든 감각을 동원해 알려 주었다. 오늘 겪었던 한가지 예를 들어 보면, Kongens Nytorv 역에서 The Royal Library로 가는 방향을 몰라 고민하다가 옆에 유모차를 모는 아가씨 같은 아줌마에게 물어보았다. 그녀도 많이 헛갈리는지 머뭇거리다 단순한 방향만을 알려주면서 미안하다 했던 것 같다. 그리고 한참 후, 아직도 역에서 지도를 들고 우물쭈물 거리는 우리에게 다시 와서 아주 세밀하게 길을 알려 주었다. 그랬다. 그녀는 나대신 주변 사람에게 길을 물어 보고 정확한 정보를 나에게 전달해 준 것이다.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미소는 확실하게 아름다웠다.
스피디한게 장점이지만 바빠서 옆을 돌아보기 어려웠던 한국에 비해 확실히 여기는 자전거처럼 느리지만 타고 가면서 옆사람과 대화를 하며 웃을 수 있는 여유로움이 있었다. 자동차는 목표 지향적이다. 중간의 과정은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지점까지 빨리가는 것을 최상의 선(善)으로 삼는다. 그러하기에 한국의 최고의 선은 성공이라는 목표다. 그래서 한국은 자전거보다는 자동차를 많이 닮았다. 성공을 위해 어떤 자동차는 엔진이 과열되어 터져 버리기도 하고, 남보다 빨리 가고 싶어 길이 아닌 곳으로 가다가 타이어가 펑크 나기도 한다.
그에 비해, 자전거는 과정 중심적이다. 자전거는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여유로움이 있다. 내가 원하면 어떤 곳에서든지 자유롭게 멈출 수 있다. 덴마크인이 삶을 주체적으로 살고자 하는 맥락과 맞닿아 있다.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 친구들과 수다를 떨며 가는 모습은 관계 속에서 자아를 찾아가는 그들과 닮아있다. 그래서 성공이라는 단어보다는 만족과 안락함을 더 좋아한다. 그들은 그것을 휘게(Hygge)한다 라고 하였다.
자동차와 자전거의 엄청난 무게 차이 만큼 그들의 실제 생활도 법정 스님만큼은 아니지만 미니멀하다. 100년이 넘은 집을 고쳐쓰는 모습, 수십년은 됨직한 많이 닳은 문과 나무 손잡이, 한번 구입하면 죽을때까지 쓰는 꼭 필요한 것만 갖추어진 세간살이 등이 그러하다. 물가가 비싸다는 소리에 걱정하며 쓰지도 않을 물건까지 싸서 그런지 20피트짜리 컨테이너를 가득 채우고 LCL로 다시 짐을 부쳤다. 여기 와서 그들의 생활을 보고선 나는 지금 무척 창피하다. 무소유를 읽으면 무얼 하나! 이 어리석은 중생에게 무소유 실천은 원숭이 도둑질 참기 처럼 어렵거늘. 반대로 많이 소유함을 자랑삼는 나와, 많이 다른 관점을 보게 되면서 나를 자각할 수 있어서 좋다. 자각은 나를 깨우쳐서 점점 새롭게 변할 것이다.
빠른 다수결보다는 합의를 이끌어 낼때까지 느리디 느린 만장일치를 선호하는 사람들. 그 들의 DNA 속에는 남 들보다 먼저, 빨리, 차별라는 단어보다는 함께, 평등이라는 단어가 발현되어 있는 것은 확실하다.
1950년대 코라 두보이스(Cora DuBois)와 칼레르보 오버그(Kalervo Oberg)는 새로운 나라로 이주하는 이민자들이 겪는 문화적 충격을 감정의 기복과 결부시켜 4단계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1단계는 신혼여행기, 2단계는 위기기, 3단계는 수용적응기, 4단계는 조화기이다. 지금 우리 가족은 발이 땅에 떨어져서 하늘을 날고 있는 허니문 시기이다. 약간의 긴장감과 함께 모든 것이 좋아보이고 흥미롭고 새로워 보일때다. 매일, 매일이 해결하기 쉬운 작은 도전의 연속이다.
현재 덴마크에서 이민정책의 문제점이 많이 발견되어 논의가 진행 중인 것 같다. 아마 덴마크도 다른 나라들 처럼 얼마지나지 않아 이민이 어려워 지지 않을까 하는 조심스러운 생각이 든다. 전세계에서 고학력자들이 많이 들어왔지만 그들이 원하는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대부분 청소나 잡일 같은 단순 노동직에서 일하기 때문이다. 여기도 실업률이 높은 편이고 실업자인 그들은 이민자들을 달가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덴마크 정치인도 한국의 정치인과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다. 나도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에서 마주하는 현실만큼 큰 벽에 부딪칠 게 자명하다. 그때까지는 이 순간을 즐기리라.
날이 밝아온다. 어둑한 창가에서 나를 지켜보던 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24시간 켜놓는 정원의 미니 분수에서 어둠에 묻혀 가려진 졸졸졸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그나저나 울라 할머니, 전기세 아깝지 않으세요?
이제 다시 잠을 청해야 겠다. 나쁜 것은 놔두고 덴마크에 좋은것만 가져가자고 내 손을 꼭 잡던 소중한 나의 아내는 내곁에서 13시간째 취침 중이다. 그 무던함이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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